큐레이션
에밀리 디킨슨 특별전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을 꾸준히 출간해온 파시클 출판사(Fascicles Publishings)와 시인의 삶과 책을 소개하는 페이지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던 시인의 삶은 흔히 알려진 고요한 은둔자의 형상보다는 “나는 아름다움으로 북적이다 죽으리라”라는 시구를 쓰는 사람의 예사롭지 않은 결단과 더 닮아 있습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스스로 살아낸 삶과 시구 속에서 끊임없이 쓰고,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시인의 모습은 지금 여기를 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웁니다.
이웃과 친구들에게 빵의 레시피를 알려주고, 뜨개질한 옷을 건네고, 직접 만든 꽃 장식과 손으로 쓴 시를 선물하는 등 사는 동안 거의 쉼 없이 사랑을 이어갔던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감 때문에 곡해되기도 했던 시인. 파시클 출판사는 이토록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시인을 오랫동안 소개해왔으며, 올해 10월에 디킨슨의 여섯 번째 시선집인 『수, 영원해!』의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디킨슨이 수잔에게 보냈던 250여편이 넘는 시와 편지들 중 일부를 골라 수록할 예정인 이 시선집을 통해 디킨슨 사후에 타인에 의해 삭제되거나 지우개로 지워졌던 사랑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파시클 출판사의 시선집 작업 노트도 특별전을 통해 소개하니, 함께 살펴봐주세요.
백여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한 다발의 시와 꽃을 들고 당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시인과 시인의 이야기들이 삶에서의 새로운 결단을 앞두고 있는 분들께,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한 발을 내딛기를 주저하고 있는 분들께 든든한 친구이자 용기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계보 없는 시를 쓴, 에밀리 디킨슨 소개
▲에밀리 디킨슨.
19세기에도 여성의 권리와 자유에는 여전히 제약과 억압이 많았지만 유럽과 신대륙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의욕적으로 활동한 여성들이 많았다. 하지만 교육받은 중산층 백인 에밀리 디킨슨은 미국 동부의 작은 농촌도시 에머스트에서 평생을 비혼으로 살았던 무명의 존재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에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당시 대중들에게 영향력 있거나 유명한 작가도 아니었다. 평생 1800편이 넘는 시를 썼지만 시인의 시는 소수의 지인들만 알았고, 친구가 편집한 시집, 지역 신문과 단체 기관지 정도에 익명으로 몇 편 기고한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출판하지도 않았다. 공적인 활동은 물론 외부인과의 교류도 없었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사후에 시가 발견되었지만 디킨슨의 시는 영문학의 문학전통과 형식에서 많이 비켜있었다. 대중적 인기가 대단했지만 초기 비평가들은 특별함에 주목하면서도 ‘여류 시인’의 배우지 못한 시로 폄하했다.
그런데 왜 하필 에밀리 디킨슨일까?
파시클의 두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한 『마녀의 마법에는 계보가 없다』의 시구처럼 디킨슨의 시는 계보 없는 계보의 시이다. 형식이나 운율은 유럽 지적 문학 전통의 규범과 관습보다는 대중적인 교회의 찬양이나 노래의 운율을 독창적으로 비틀고 과감하게 다양한 분야의 어휘를 시어로 사용하고 소재의 구애도 받지 않았다. 당시의 문학적 관례로는 매우 낯설고 이상했을 수 있겠지만 시인은 교훈과 계몽을 설교하기보다 사상을 감각하고 언어로 그리고 연주하는 창작자였다. 당시 미국의 첨예한 주제였던, 노예제도와 선거제도,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상업자본, 제국과 식민의 관념이 당돌하게 시어로 들어온다. 해석은 읽는 이의 몫이지만 말이다.
문학과 예술이 다수의 대중적 독자와 관객을 대상으로 대중의 기호와 윤리에 협상하고 타협하던 시기에 디킨슨은 고립했고 시는 난해했다. 그러나 디킨슨에게는 함께 시를 읽고 반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대개는 여성이었다. 디킨슨은 시와 함께 빵의 레시피나, 뜨개질한 속옷이나, 정원에서 따온 꽃으로 만든 꽃장식을 선물하고 감상의 편지를 받았다. 하루의 풍경과 읽은 책의 독후감이 시와 편지로 오고 갔다. 친구들은 때로는 디킨슨의 시를 출판하고 싶어했고 때로는 대중적 독자들의 반응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디킨슨은 손바느질로 제본한 작은 종이다발(fascicles)에 자신의 시를 정서하여 모아두었다. 파시클은 당시 여성들이 즐겨 만든 일종의 블로그였다. 직접 손제본한 작은 책자에 19세기 미국 여성들은 책에서 읽은 좋은 글귀나 시를 옮겨두곤 했는데, 디킨슨은 자신의 시로 파시클을 만들어 보관했다. 생각해보면 양적으로나 수준으로나 엄청난 시를 쓰면서도 공개하지 않았던 시인의 시적 활동은 상업적 출판 영역에서 보면 기이하고 이상할 수 있지만 ‘여류작가’에 걸맞는 대중적 공감과 출판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자기만의 플랫폼이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디킨슨의 시는 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매력적이다.
박혜란(파시클 출판사 대표/번역자)
해체되고 지워진 시인의 이야기 『수, 영원해!』 작업 노트 (10월 출간 예정)
당신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를 내가 읽어도 되겠습니까?
여섯번째 시선집 출간 작업을 시작할 당시, 번역자의 질문이었다. 『수, 영원해!』는 디킨슨이 수잔에게 보낸 시들 중 일부를 고르고 번역한 시선집이다. 수 또는 수잔 혹은 수잔 헌팅턴 디킨슨Susan Huntington Gilbert Dickinson은 에밀리 디킨슨의 오랜 친구였고, 오빠의 부인이었고, 디킨슨의 시를 가장 많이, 먼저 읽은 독자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수잔에게 250여편의 시를 보냈다고 한다. 이 시들 가운데는 받는 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내용도 있지만, 디킨슨은 편지로 자신이 쓴 시를 보내, 감상을 듣고 수정하고 새로운 시로 완성해가기도 한다. 수잔에게 보낸 시들은 다시 시인이 정리하여 파시클에 기록해두기도 한다. 수잔은 시인에게 받은 시를 지역 신문 편집장이나 지인들과 돌려 읽기도 했고, 몇몇 시는 지역 신문에 게재되기도 한다.
디킨슨이 죽은 다음 디킨슨의 글은 출간을 위해 편집자에게 보내졌는데, 파시클은 해체되고 몇몇 내용, 특히 수잔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삭제되거나 지우개로 지워졌다. 시 내용 전체가 펜으로 지워지기도 했다. 사실 과거의 사건은 기록에 의존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남아 있는 수잔의 글이나 기록으로는 수잔과 디킨슨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디킨슨의 시와 편지는 아름답고 부럽고 가끔 시리다.
지워진 수신인 수에게 보낸 에밀리 디킨슨의 시. 어쩌면 누군가가 다른 이들에게 읽히게 하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당신이 그녀에게 보낸 시를 읽어도 되겠습니까?
박혜란(파시클 출판사 대표/번역자)
▲지워진 수신인 수에게 보낸 에밀리 디킨슨의 시.
에밀리 디킨슨 특별전 ㅣ 파시클 출판사에서 추천하는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3권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소개하는, 파시클 출판사
요즘은 국내 저자들의 책을 조금씩 만들고 있지만, 파시클 출판사는 에밀리 디킨슨 시를 소개하기 위해 시작한 번역자의 1인 출판사이다.
디킨슨의 뛰어난 감각의 시들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디킨슨의 창작 방식을 지금의 독자들과 함께 얘기하고 싶다. 무명의 존재(nobody)이지만 자신과 창작 자체의 존재만큼은 오롯이 지켜냈던 완강함, 다른 이들이 볼 때는 순응적 숙녀들이었지만 디킨슨의 발칙한 상상을 함께 공감하고 즐길 줄 알았던 친구 독자들. 광장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웅변만큼이나 필요한 것들. 골방에서 다친 상처를 내보이며 깔깔댈 수 있는 속삭임. 고양이의 오후. 개의 산책. 뱀과의 조우. 산책길에 옷깃에 묻혀온 우엉 가시. 그리고 너에게 갈 수 없는 거친 밤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진리를 에밀리 디킨슨이 들려주지는 않지만 디킨슨에게는 괜찮은 얘기들이 참 많다.
물론 디킨슨의 시가 아니더라도 이런 얘기들을 파시클 출판사는 조금씩 풀어내고 싶다. 그리고 지금 파시클 출판사는 19세기 미국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여섯번째 시선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박혜란(파시클 출판사 대표/번역자)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가 들어간 제2회 앨라이 도서전 책갈피는 전국 14곳의 앨라이 서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